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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답게 사는 방법은?

#무재칠시(無財七施) - 불어오는 바람을 외면하지 말자

by 보린재 2022. 4. 28.

무재칠시(無財七施)

무재칠시(無財七施)는 가진 것이 없다하더라도 베풀 수 있는 것이 일곱 가지는 있다는 명언으로 불경에 나오는 문구다. 무재칠시는 인간계에서 진정 남을 위해 베풀고자 하는 마음만 가지고 있으면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이다.

 

흔히 남에게 베푼다(보시)고 할 때는 물질적인 것을 주로 생각한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음식을 대접하는 것, 병원비가 부족한 사람들에게 병원비를 대주는 것 등등을 말이다. 이런 형태의 베품도 필요하다.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시혜(施惠, 은혜를 베풂, 또는 그 은혜)라는 인식을 심어주어 약자에 대한 배려의 정신, 베품의 자세는 사라지고, 가진 사람이 가지지 못한 사람에게 도와주는 것이란 인식을 심어주게 된다.

 

석가모니는 아래 일곱 가지를 행하여 실천하면 행운이 따를 것이라고 타일렀다. 아래 일곱 가지는 평상시에도 일상화되어 있는 사람들도 있다. 아마도 무재칠시가 전해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시대의 사대부 집안에서는 이 실천지침들이 실재로 행해지고 있었고, 이를 따르려는 선비들의 수양덕목으로 중시되었다.

 

서비스란 개념과 무재칠시

현대사회에서 인위적이긴 하지만 무재칠시의 정신이 강조되고 있는 것도 사살이다. 대표적으로 고객들을 대상으로 하는 직종에서 매우 중시하는 것이 서비스 정신이다. 심지어 고객을 왕처럼이란 슬로건이 한때 유행하기도 했다. 왜 고객이 왕인가? 고객은 왕이 될 수 없다.

 

그럼 서비스(Service)란 무엇인가? 서비스란 단어는 라틴어에 어원을 둔다. 라틴어 세르부스(servus, 노예)에서 유래하는데, 이 단어가 영미권에서는 Slave(노예)’로 정착되었다. 지금의 러시아 민족을 슬라브 민족이라 할 때, 영어식 표기로는 ‘Slave’가 된다.

 

서비스의 사전적 의미는 다른 사람을 위해 도움을 주거나 배려해주는 행위 또는 기술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현대에서는 자신의 정성과 노력을 남을 위해 사용한다.’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 의미가 나타내는 바의 서비스는 단순히 사무적인 서비스거나 물적 욕구를 충족시킨 후에서야 만족을 느끼는 한계 수요에 대한 서비스가 아니라 서비스 그 자체의 욕구 충족이 물적 욕구충족보다 더 중요함을 일깨워준다. 아무리 서비스 정신이 투철하다 한들 무재칠시만큼이야 하겠는가?

 

무재칠시(無財七施)는 다음과 같다. 첫째는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화안시(和顔施), 둘째는 말로써 베푸는 언시(言施), 셋째는 따뜻한 마음을 주는 심시(心施), 넷째는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 안시(眼施), 다섯째는 몸으로 돕는 신시(身施), 여섯째는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 좌시(座施), 일곱째는 굳이 묻지않고 상대의 속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 찰시(察施)이다.

 

이 일곱 개의 뜻을 찬찬히 뜯어보니 문득 친절이란 단어가 떠오른다. 즉 무재칠시라는 7가지는 고객 만족도 향상이란 개념과 상통한다. 7가지의 베푸는 마음은 서비스업에 종사하거나 공직자가 민원인을 대할 때 가져야 하는 태도와 동일하다 하겠다. 사실 돈 한 푼 들이지 않고 남에게 베푸는 보람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만족감을 제공해주니 일석이조 아니겠는가?

 

요즘 공직사회는 물론이고 기업들에서도 국민들을 대상으로 실시간 만족도 조사를 한다. 가전제품 서비스를 받으면 기사가 명함을 건네면서 전화 오면 잘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한다. 늘상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이다. 더 나아가 ‘CS강사를 초청하여 단순한 고객만족을 넘어 고객감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이는 곧 고객이 감동할 때까지 맞춤형 서비스를 제공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일 것이다. 무재칠시의 현대적 변용이다.

 

이래저래 대한민국 국민들은 마치 자신이 왕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절한 서비스를 받는다. 그 대가로 국민들은 세금을 내고 서비스 이용료를 지불한다. 그럴수록 정부나 헌법기관들은 국민을 내세워 국민만 바라보고 가겠습니다.’라로 외친다. 내면에 숨겨진 날카로운 발톱을 숨긴 채로 말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 베풀고 나누는 삶

이런 성인들의 가르침들이 왜 한창 공부할 때는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이 나이 먹고서야 한참 공부하던 시절의 책들을 꺼내보아야만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앞으로 남은 생() 어떻게 살 것인가? 설령 다짐한다고 해서 그렇게 살아질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오늘 하루만은 내 자신을 돌아봐야겠다.

 

흔히 성현들은 세상사는 이치에 대해 이렇게들 얘길 한다. “비우면 다시 채워지고 베풀면 그만큼 그 빈자리를 채운다.”고 말이다. 이는 곧 내게 있는 것을 비우고 다시 새것으로 채우는 데 노력해야 하며 남을 배려하고 베푸는 데 인색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것이 말처럼 쉬운 일인가?. 설령 내게 있는 것이 한시적이라 할지라도 많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이 인간이다. 한시적이기 때문에 베풀어야 한다는 논리는 설득이 되질 않는다.

 

베푸는 데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는 것 같다. 물적인 베풂과 무형의 심적인 배풂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가진 무형의 기능과 기술도 역시 베푸는 자원이 될 수 있다. 흔히 우리는 이것을 재능기부라 한다. 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무언가를 주는 행위 혹은 베푸는 행위를 기독교에서는 사랑이라 한다. 사랑은 도와주고 베푸는 것이다. 이때 고려할 점은 무조건 베푸는 것이 아니라 필요로 하는 사람을 찾아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교직에 있는 사람은 제자를 가르치고 베풀 때 사랑을 담은 말 한마디 한마디는 제자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刻印)되어 제자의 인생을 빛나게 한다. 또한 봉사하는 삶도 그려볼 수 있다. 흔히 특정 행위결과에 대해 인과응보(因果應報)’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인과응보, 선행을 베풀면 선행이 돌아오나 악행을 하면 불행의 악운이 나를 괴롭힌다는 것이다. ‘행한 대로 되돌아온다.’ 정도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이젠 한국식 능력주의에서 벗어나자

얼마 전 인터넷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군 지방대 학벌논란이 있었다. 박지현 더불어민주당비상대책위원장이 언론과 인터뷰를 했다. “제가 춘천 한림대를 나왔는데 이를 두고 주변에서 한림대 나온 얘가 무슨 말을 하냐는 식의 말을 많이 한다면서 능력평가 기준이 오로지 학벌이 돼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서울대 재학생 및 졸업생 온라인 커뮤니티인 스누라이프에는 저학력이 벼슬인 세상이라는 댓글이 올라왔다. 또한 이 게시판에는 “‘스카이(SKY, 서울대 고려대 연세대)’도 못한 걸 한림대가 한다고 라는 댓글이 달렸다. “난 얘(박지현)가 나오고서야 한림대를 처음 알았다.”등의 댓글이 이어지고 있었다. 박지현이라는 청년이 비상대책위원장이 되고서야 주목도가 부쩍 높아진 모앵새다. 100여개의 게시물은 박 위원장의 학벌을 폄훼하는 적나라한 혐오발언이 주류를 이루었다.

 

혹시 국평오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국평오란, “대한민국 국민 평균은 수능 5등급의 준말이다. 이 단어는 여기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의 학벌이나 이해혁을 비하하는 의도로 쓰인다.

 

이 같은 논란이 작년에도 있었다. 청와대가 지난해 6월 박성민이라는 청년을 청와대 청년비서관에 임명했을 때다. 박 비서관은 강남대를 자퇴하고 고려대학교에 편입했다. 이 이력을 문제 삼은 것이다. 박 비서관이 순혈이 아니라는 얘기다. 순혈이면 인정되고 순혈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다는 얘기인가?

 

하기야 행정고시에 합격하고 연수를 마치면 5급 사무관으로 임용된다. 이런 상황에 25세의 대학 재학생인 박 비서관이 1급 공무원으로 임명했으니 이게 과연 공정한 것이냐의 논란은 있을 수 있다. 심지어 고려대에 재학중인 한 학생은 박탈감 닷컴이라는 웹사이트를 개설해 박 비서관의 사퇴를 주장하기도 했다.

 

이 두 청년이 논란이 된 것은 그들의 학벌이다. ‘시험을 통해 학벌로서 증명되지 않은 능력은 인정받지 못한다. 그렇다면 역으로 생각해보자. 대통령 당선자도, 법무무장관 지명자도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그렇다면 이 둘은 과연 증명된 학벌을 가지고 상식에 따라 수사하고 처벌했는가? 단지 학벌이 한 개인의 능력의 절대치인 것처럼 판단해서는 안 된다. 이런 학벌에 기초한 능력주의는 무재칠시의 입장에서 보면 한낮 허영심에 불과하다.

 

나가면서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자마자 최대의 화두는 공정이었다. 윤석열 당선자도 역시 공정상식’을 화두로 내세웠. 공정이라는 화두는 5년 내내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대표적인 것이 인국공(인천국제공항공사)’사태다. 공개채용시험을 거치지 않은 비정규직 보안검색 노동자들을 정규직과 동등하게 대우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반발이 거셌다. 취업준비에 혈안이었던 수험생들이 길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청년 세대의 취업 기회를 빼앗았다고 주장했다. 이들의 주장도 일리는 있다. 수험생들은 짧게는 1~3, 길게는 10년이라는 기간 동안 공무원 시험준비를 한다. 내 제자 한명도 10년이라는 기간을 공부한 끝에 행정고시에 합격했다. 이러다 보니 이들의 박탈감은 어떠했겠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것을 문재인 대통령이 공약으로 내세웠으니 약속을 지킨다는 차원에서 약속지키기 보다는 좀 더 숙려기간을 갖고 충분히 준비한 다음 대화를 통해 해결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해본다.

 

사실 이 같은 공정 담론의 밑바탕에는 한국식 능력주의가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능력주의란 용어는 1950년대 영국의 사회학자 마이클 영(Young)제시한 개념이다. 영은 능력주의를 세습 신분 중심의 사회에서 능력 중심의 사회로 이행하는 합리적 과정이란 의미로 사용하자고 제안했지만, “오직 성공을 개인 능력의 산물로 여기는 측면도 포함하고 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 능력주의는 전자일까? 아니면 후자일까? 맞다 후자이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공정이라는 담론에는 사실상 능력주의의 일종이라 할 수 있는 시험만능주의(Testocracy)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럴까?

한국 사회에서 대학입시 결과는 개인의 능력을 확인시켜주는 동시에 개인의 능력을 수치화해 주는 평가방법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 한국적 상황에서 시험이라는 하나의 방법으로 개인의 능력을 결정한다. 이런 상황에서 학벌주의와 능력주의는 끈끈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렇다면 능력주의는 차츰 약화될 것인가? 난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나라가 고도성장이 이뤄지던 시기에는 일자리를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그때는 능력주의가 건전하게 작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고용없는 성장이 지속되거나 저성장에 빠지게 되면 노동시장이 양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극소구의 경쟁력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하니 능력에 따른 차별은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부정적인 측면의 능력주의 이면에는 학벌주의가 자리 잡고 있다.

 

능력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만약 승자가 되지 못한 대다수의 사람들을 능력이 부족하다거나 노력을 하지 않은 사람들로 치부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는 곧 사회적 불평등으로 확산된다.

 

능력주의를 다룬 책들은 많다. 작년에 우리나라에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던 하버드대학의 마이클 센델교수의 공정하다는 착각이나 박권일의 한국의 능력주의가 대표적이다. 이들 책들은 한결 같이 능력주의에 한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예컨대 명문대학생들은 스스로 치열한 경쟁속에서 공정한 절차(시험)를 거쳐 능력을 인정받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면으로 들어가 보면 이들은 풍족한 경제적 배경을 밑바탕으로 풍족한 환경속에서 자라나 입시경쟁에 유리한 환경을 타고 났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능력의 형성 과정 자체가 불공정함에도 불구하고 능력주의란 미명하에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라도 능력주의의 필요성은 인정해야겠지만 능력주의가 공정하게 작동할 수 있는 방식을 찾아내야 한다. 특히 사회적 신뢰와 연대감을 높일 수 있는 제도 방안이 재빨리 마련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 밑바탕에 무재칠시(無財七施)가 자리하고 있어야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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