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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적인 이슈는?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2. 냉전반공주의 민주주의

by 보린재 2022. 3. 5.

얄타에서 루스벨트 미국대통령, 처칠 영국 수상, 스탈린 소련의 최고인민위원이 나치 독일의 최종 패배와 점령을 논의하기 위해 크림 반도 얄타회담장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출처 다음백과

얄타회담과 남북분단 - 냉전반공주의의 시작점

우크라이나의 남부 해안도시인 얄타(Yalta)는 한반도의 운명이 결정된 장소이다. 이 곳에서 19452월 얄타회담(Yalta Conference)이 열린다. 연합국의 일원인 미국의 루스벨트(Roosevelt) 대통령, 영국의 윈스턴 처칠(Churchill) 총리, 소련의 요시프 스탈린(Stalin) 최고인민위원은 얄타에 모여 두 가지의 중요한 결정을 한다.

 

하나는 나치 독일의 분할 점령 원칙을 재확인하고, 미국영국프랑스소련이 분할 점령하기로 합의하였고, 1946년 얄타협정이 공표된다. 이 협정의 공표는 사실 둘째,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 소련의 지원이 필요함을 강조하기 위해 체결된 것이었다. 불행은 여기서 시작된다. 소련이 참전한지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하고 만다. 일본의 항복이 너무 빨랐다. 이 당시 소련은 한반도의 동북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미국이 제안한 것이 38선의 분할 제안이다. 미국의 속셈은 서울, 부산, 인천 등의 확보이며, 소련에 의한 한반도 전체의 공산화를 두려워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해 8월 미국의 대통령 트루먼의 승인과 소련의 수용의사 표현으로 분할 점령이 결정된다 일본의 패망으로 한반도에 주둔해 있는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위해 북위 38도선을 군사 분계선으로 설정해 남쪽은 미군이, 북쪽은 소련군이 주둔하기로 합의하에 소련군이 해방 직후에 평양으로 들어왔으며, 미군은 9월 초에 서울로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게 된 것이다.

 

일본을 무장해제하기 위해 미국과 소련 간 잠정적인 분획선이다. 하지만 미국과 소련이 38도선을 중심으로 남과 북에 미소군정이 실시됨에 따라 정치적이념적 경계선으로 자리잡게 된다.

 

미군정은 이승만김성수송진우 등의 보수적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들과 연대를 강화한 반면, 극좌파는 물론 사회민주주의자, 온건 좌파인 여운형, 조선건국준비위원회 그룹들을 탄압하거나 배제하였다. 그 후 38선 이남에서는 좌우 이데올로기 투쟁의 극단적 전개는 사회적 혼란을 초래하게 되고 특히 남북한에 각각 자유주의 정권과 공산주의 정권이 수립되는 과정에서 극한으로 치닫게 되고 남한에 본격적으로 냉전이라는 미소의 이데올로기가 남한에 정착하게 된다.

 

냉전이 남한에 제도화되는 과정은 세 단계를 거치면서 나타난다. 첫째, 해방공간 초기에는 좌파세력이 우세하였다. 좌파세력에는 사회주의 지지자, 무정부주의 지지자, 공산주의 지지자가 섞여 있지만, 미군정에서 공산주의자는 숙청을 통해 많이 약화되었고, 사회적 민주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들이 우위를 점하게 된다. 둘째, 1945년 말1946년 초, 신탁통치 찬반 운동을 거치면서 좌파의 기세가 꺾이고 우파의 기세가 상승하게 된다. 셋째는 19469월 총파업과 10월 항쟁을 거치면서 좌파의 기세는 현저히 약화되고 우파가 우세해지고, 19477월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면서 우파 헤게모니가 형성된다. 이 우파 세력(이승만과 한민당 세력)에 의해 권력독점이 이루어짐으로써 냉전 이데올로기는 남과 북으로 단순화되는 구조를 띠게 된다.

 

냉전(좌우) 이데올로기의 극단적 대결은 두 가지의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 하나가 강력한 국가의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고, 또 하나의 유교국가의 전통을 잇는 강력한 중앙집권화된 관료국가의 전통을 체계화시킨 것이다. 먼저, 강력한 국가는 군과 경찰, 검찰과 방첩기구 등이 그 권력을 강화하게 되고, 특히 이들은 해방공간에서 우파에 대항하는 좌파와 좌파에 동조하는 민중들을 탄압하는데 동원되었다. 둘째, 조선조 유교국가의 중앙집권화된 관료국가의 전통, 여기에 식민통치 기간 동안 일본이 만들어놓은 강권적 국가기구의 조합의 결과였다.

 

주의할 점은 위의 두 가지 요소 때문에 해방 이후 자동적으로 강력한 국가가 만들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해방 이후 사태 전개가 과거의 유산과 제도를 다시 불러들여 강력한 국가가 형성된 것이다. 예를 들면, 해방 공간에서 냉전의 전개, 이데올로기적 양극화, 분단국가의 수립 과정에서 사회적 동원이 억압해체되는 과정은 과거 식민지 국가기구의 역할이 다시 복원되는 과정에서 강력한 국가(최장집 선생은 이를 과대성장국가로 표현)가 출현하게 된다.

 

중앙집중화와 관료국가 형성

중앙집중화란, 정치권력의 서울로의 집중화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문화, 교육 등 모든 영역에서 서울이라는 한 곳에 집중된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중앙 집중화는 지리적공간적 구조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지금은 초집중화 현상을 보여준다. 그 단적인 예가 전 인구의 과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으며, 산업시설 역시 수도권에 집중되어 있고, 명문대학 역시 서울에 집중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에서 서울과 수도권으로의 집중은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로서 정치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엘리트들이 탄생하게 되고 이 엘리트 지위로 상승하기 위한 경쟁은 더욱 치열하게 된다.

 

이러한 집중화의 동력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토크빌은 자율적 중간집단의 약화와 부재 그리고 그 결과로 가속화되는 관료적 중앙 집중화이론은 한국 사회에서 상당한 정합성을 갖는다. 특히 한국의 과거 중앙집중화에 대해 최장집 선생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치에 대한 대중 또는 민중 참여의 채널들이 혀소화되거나 봉쇄된 엘리트 중심 지배체제의 결과물이라 본다. 이는 해방공간에서 형성된 좌우 이념 갈등에 뒤이은 냉전 반공주의의 확립은 이념적 획일주의와 더불어 사회의 모든 자원을 독점 배분하는 국가 관료 체제를 강화했으며, 그것이 보다 더 강력한 중앙집중화를 초래했다는 의미이다. 이런 조건에서는 넓은 이념적 지평위에서 서로 다른 엘리트간 경쟁은 불가능하게 되고, 극도로 단순화되고 동질적인 엘리트 구조가 강화되며, 이는 대를 이어 세습되는 성향을 갖게 된다.

 

보수 양당체제의 형성

강력한 관료국가체제의 형성은 상대적으로 허약한 대의제도에 기반을 둔다. 허약한 대의제도는 곧장 허약하고 좁은 이념(이데올로기)인 반공 냉전이데올로기를 그 기초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양자는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된다.

 

해방 공간에서의 주요 정치세력을 보자.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이승만 중심), 한민당(김성수송진우 중심), 한독당(김구와 상해임시정부 그룹), 중간파 그룹(김규식 중심의 민족자주연맹), 건국준비위원회(여운형 중심, 후에 인민당, 근로인민당 세력), 조선공산당(박헌영 그룹, 남로당으로 변경) 등이다. 이 중에서 박헌영은 월북했고, 남북이 자유주의와 공산주의로 분단된 상황에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의 약화는 불가피했다. 분단국가 성립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이승만계의 독립촉성중앙회와 김성수송진우 등의 한민당 계열과 달리 김구와 김규식의 우파세력, 여운형 같은 온건 좌파 세력은 분단에 반대하면서 분단국가 성립에 참여하지 않았다.

 

분단국가 성립과정에서 이승만 그룹과 한민당만이 선거에 참여함으로써 분단국가 성립의 두 중심축이 된다. 625전쟁 이후 자유당 대 한민당이라는 양당체제의 틀이 견고해지게 된다. 지금의 양당체제의 두 축인 국민의 힘과 더불어민주당은 분단국가 형성의 두 주역인 이승만의 자유당 전통과 한민당(민국당, 민주당으로 변화)에 그 기초를 두기 때문에 보수주의 정당이라 칭했다. 더군다나 이들은 이념적으로 냉전반공이데올로기를 토대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후 여야당은 이념적으로 동일한 지평위에서만 경쟁이 가능했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없었고. 여야당은 사회전체, 국가전체, 민족전체의 대의와 이익을 내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에 대항하거나 냉전반공주의이데올로기를 수정하려 하면 정치적 탄압의 대상이 될 수 밖에 없었다. 대표적으로 1950년대 진보당의 조봉암이 그 대표적 인물이다.

 

냉전반공주의와 한국 민주주의

냉전반공주의는 그 자체로 보수적일 수밖에 없으며, 보수적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왜냐하면 이 이데올로기는 남북한 간 적대적 분단체제에서 이에 대립되는 그 어떤 이데올로기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예컨대 노동문제나 계급 불평등의 문제를 사회이슈화 하거나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수정하고자 하거나 이것과 관련된 정책과 프로그램을 주장하거나 이데올로기적 공격의 대상이 된다. 박정희, 전두환의 정권에서 이러한 일을 비일비재하게 용공세력’, ‘간첩단 사건’, ‘친북인사등등의 이름으로 불리면서 국민들에게 공포심을 안겨 주었다.

 

냉전반공이데올로기는 한국 민주주의 발전에 치명타를 안겼다. 그 첫째가 좌우 이외에 이데올로기적 중간영역을 부정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곧 정치 경쟁이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논쟁으로 나타나 이를 반대하거나 부정하는 비판자들을 배제시켰다. 대표적인 사건이 전두환 시절 김영삼의 민주당 소속 대구 출신 유성환 국회의원이 대한민국의 국시는 반공이 아니라 통일이어야 한다고 연설한 결과는 국가보안법에 걸려 구속되었다. 이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다시 협소한 흑백논리적 양자택일의 정치를 강화시켰다.

 

두 번째 치명타는 대한민국에서 국민이라는 용어 대신에 인민이나 민중, 계급 등의 용어는 좌파 혹은 공산주의자 또는 빨갱이로 치환시켜 국가보안법 적용을 통해 국가, 사회와 분리시켰다. 다양한 정치담론을 담는 정치 용어의 제한은 참다운 민주주의의 구현이 불가능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의 정당체제는 이념적으로 스펙트럼의 범위가 협소해지고 정치세력이 사회적 약자나 새로운 대안적 담론은 물론이고 이념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의 조직화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결과 여당이든 야당이든 밑으로부터 대중적 요구나 이익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지도자의 그를 둘러싼 엘리트 중심적 성격이 강화될 수밖에 없다. 이들이 정치엘리트의 자리를 확고하게 하고, 이 정치 엘리트들이 엘리트 관료집단, 군인집단, 법률가 집단과 결합해 그들의 지위를 더 확고히 하게 된다.

 

결론적으로 냉전반공주의 헤게모니는 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즉 냉전이데올로기는 민주주의 발전을 제약해서 민주주의를 크게 저해할 수밖에 없다. 민주주의란, 공정한 절차를 거쳐 보편적인 평등선거, 다수결의 원칙,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 등 최소한의 절차적 요건을 갖춘 정치체제이다. 또한 민주주의는 천부인권에 기초를 둔 인간의 존엄성의 인정, 자유와 정치적 평등을 그 기초로 하는 정치체제이다. 최근 아니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서는 냉전반공이데올로기가 어느 정도 정치적 위력을 발휘하곤 한다. 북한에 대해 선제타격을 주장하면 극우주의자들로부터 열광적인 환호를 받기도 한다. 이것이 75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국사회의 한편에 엄연히 존재하는 현실이다. 앞으로 한국민주주의가 극복해야 할 첨병이 바로 냉전반공이데올로기의 극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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