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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쟁적인 이슈는?

#한국 민주주의 무엇이 문제인가? -1

by 보린재 2022. 3. 1.

3월 9일은 20대 대통령 선거일이다. 물론 사전투표도 있지만 본 선거일이다. 투표에 참여하지 않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들을 마냥 비판하는 사람들을 흔히 보게된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 표를 잘 행사해서 이 땅에 민주주의가 확고하게 자리잡도록 하는 것도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들어가면서

한국 현대 민주주의 발전과정에서 1987년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는 시기이다. 해방 이후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반공냉전 이데올로기가 막을 내리고 진정한 민주주의가 한국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로 자리 잡지 않을까하는 믿음이 그땐 있었다. 그 이후 35년이 지난 지금 한국 민주주의는 다시 냉전 이데올로기가 주된 이념이 되느냐 마느냐를 결정하는 결정적 시기가 다가오고 있는 중이다.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것이 작금의 대한민국에게 묻고 있다.

 

그렇다면 87체제 이후 한국 사회는 질적으로 좋아졌느냐 아니면 나빠졌느냐고 묻는다면 나빠졌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 이유 중 하나가 계층 간 불평등구조가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훨씬 더 ᄈᆞ른 속도로 심화되었고, 근대화시기 교육과 근면하기만 하면 가능했던 계층 이동과 사회이동의 기회는 크게 줄어들었다. 강남을 중심으로 한 상층계급 문화가 한국의 주류 문화로 자리 잡았고, 중산층과 상층의 특권화된 문화와 소위 서민이라고 할 수 있는 사회 부분간의 괴리는 더욱 확대되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을까? 나는 대한민국의 정당체제에 그 이유가 있다고 본다. 소위 집권당과 야당으로 대표되는 두 당의 보수적 이념에 기반한 정당정치가 기존의 정치행태가 지속됨으로서 사회 혹은 시민들이 기대하는 바와 거리가 먼 정치계급의 투쟁장이 그 직접적인 이유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정치행태는 정치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넘어 거의 냉소에 가까운 무관심의 영역으로 이동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현상의 지속은 국민들로 하여금 강렬한 변하를 바라는 사회의 심리가 한국정치의 한 특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1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둔 상황에서 문국현 바람, 18대 선거를 앞두고 안철수 현상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20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대한민국에서 화두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만들것이냐? 아니면 지금까지 잘 지켜온 민주주의를 유지하고 발전시킬 것이냐?라는 두 주제가 서로 다른 이데올로기로 다가오는 현실을 실감나게 하는 경우도 없다. ‘87체제를 수입하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투쟁과 희생이 뒤따랐다. 2022년 현재 민주주의는 더 이상 국민들의 기대와 열정을 만들어 내는 단어가 아니다. 이제 상당수의 국민들은 그동안 민주주의를 위해 희생하고 투쟁했던 사람들조차도 현 민주주의 상황에 대해 냉담 혹은 비판적이 되었다. 그 이유는 그동안 민주주의를 통해 기대했던 바와 실제의 결과 사이에 격차가 만들어 낸 실망의 표현일 것이다.

 

정치학자들은 민주주의를 정의함에 있어 보통선거권, 주기적인 선거, 정단 간 경쟁을 통한 정부의 구성 등 민주적 경쟁의 규칙을 확립하는 절차적 최소요건을 갖춘 정치체제로 이해해 왔다.

 

더 넓은 관점에서 토크빌(Tocqueville)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는 정치체제라기 보다는 사회의 상태로 바라보기도 한다. 다시말하면, 민주주의는 정차적 최소요건을 갖춤으로서 스스로 자기발전의 경로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가 어떤 지적도덕적문화적 토양을 발전시키는가에 따라 더 좋은 내용으로 발전할 수도 있고 그 반대일 수도 있는 것이다. 현 시점에서 국민들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실천하고 발전시키느냐에 따라 한국 민주주의의 미래를 결정될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이해하는 수준과 같이 간다는 의미이다. 민주주의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이라는 사회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질적으로 발전해야 하고 더 나아가 국민들이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한다.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이해의 정도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참여하는 데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일종의 기관차라 할 수 도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식인의 역할이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의 역할을 축소되고 그 자리에 언론의 지배적 담론과 기득 이익을 위한 수구적 논리가 대신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지식인들은 주류 언론이 만들고 주도하는 이슈와 의제의 틀 안에 동원된 필자일 뿐이다. 그 결과 언론은 대한민국의 여론을 주도할 뿐만 아니라 지식인 사회와 정치의 세계를 지배하는 담론의 생산자가 됨으로써 우리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대한 비판적 문제의식이나 이성적 논쟁은 숨 쉴 틈을 놓쳐버렸다.

 

무엇이 문제인가?

낮은 투표율과 대표성 위기

1987년 민주화 이우 유권자의 투표 참여율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다. 1987년 민주화 직후 최초의 정초선거라 할 수 있는 13대 대통령선거와 국회의원 선거의 투표율은 89.2%75.8%였다. 이 때 이후 대통령 선거투표율을 보면, 80% 아래로 떨어졌다. 국회의원 투표율도 마찬가지이다. 18대 총선에서는 46.0%로 낮아졌다가 21대 총선에서는 66.2%로 높아지기도 했다. 투표율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20대 유권자의 낮은 투표율 때문이다. 199615대 총선에서 20대 유권자의 투표율은 총 투표율 64%보다 20% 낮은 44%, 200818대 총선은 29%에 그쳤다. 이들이 투표를 외면한 것은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그리고 부패가 그 원인이었다. 국회의원은 정치적 대의를 위해 헌신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정치적 자산을 증대하는 데에만 관심을 보였다.

 

투표율 저하는 전 세계적인 현상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처럼 급격하게 떨어지게 되면 투표결과의 절차적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할 지경에 이른 예는 일찍이 찾아보기 어렵다. 이런 조건에서는 투표 결정이 합리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집권정부의 무능력에 대해 책임을 추궁하고자 하는 유권자의 합리적 선택은 강력한 반대당을 지지하는 것이겠지만, 야당을 대안으로 신뢰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오늘의 무능한 집권당을 비판하기 위해 과거의 무능했던 정당을 지지하는 데 자신의 한 표를 기꺼이 소비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보수편향의 정치적 대표체제와 소선거제

한국의 민주주의가 위기를 초래한 가장 큰 문제는 냉전 반공주의에 기초한 보수주의 대표체제와 소선거구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소선거구제하에서 진보적인 성향을 갖는 유권자 역시 적극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대안이 부재한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진보 정당의 후보를 지지하고자 하더라도 1위 득표자 이외의 표가 사표가 되는 선거제도하에서 진보 정당 후보에 제대로 투표하겠는가? 국회의원 총선에서 지역구 당선자들의 평균득표율은 45%에 불과하다. 각자의 지역 기반에서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는 거대 정당 이외에 진보 정당이 독자적으로 이 정도의 득표를 할 수 있는 지역구란 사실상 거의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최장집 선생은 냉전 반공주의가 지배하는 보수 편향의 정치적 대표체제가 만들어내는 사회적 결과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서민과 노동계급의 이익 및 요구가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못하는 노동 없는 민주주의를 지속시키게 된다. 좀 더 미시적으로 들여다보면 그것은 노동을 천대하는 사회 분위기를 만들고, 일에 대한 헌신이 갖는 사회적 가치를 경시하며, 따라서 부동산 투기나 재테크, 펀드 관리와 같이 생산적 노동을 동반하지 않는 그야말로 돈벌이 그 자체에 우리 사회가 열병처럼 휘말리게 되는 결과를 낳는다.”고 갈파했다.

 

이런 노동 없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정의로운 것이 무엇이고 무엇에 저항할 것인가라는 87체제가 우리 사회에 제기한 문제의식은 망각되고 자본주의의 물신성에 잔뜩 흡수되고 말았다. 더군다나 대한민국의 지도층이나 정치인의 자신의 행위 결정에 대한 준거를 사회정의에서 찾는 예는 매우 드물다. 운동권 출신이 대통령을 하고 여야를 막론하고 국회의원 가운데서도 최대 집단이 되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다. 이들의 논리는 어떻게 하는 것이 효율적인가라는 무규범적인 기술적 합리성만을 중시하게 되고, 결국 우리 사회의 공동체 문제를 도외시하는 것일 뿐이다.

 

국무총리나 장관, 검찰총장, 대법원장과 대법관 등의 인사청문회에서 누가 덜 부패했고 부조리를 저지르지 않았는지를 경쟁하는 듯하다. 부정과 부패 없는 공직 후보를 내세우는 일은 현재의 정치구조에서는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이러한 보수적 정치체제는 진보적 정치세력의 배제에만 그치지 않고 한국 사회를 도덕적으로 타락시키는 가장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허쉬만(A. O. Hirschman)상품 시장에서 소비자의 이탈은 상품 공급자인 기업에게 소비자의 선호에 적응하도록 만드는 자기 조정의 효과를 갖지만, 선거 시장에서 유권자의 이탈은 정당이라고 하는 정치 기업에 변화를 강제하는 효과가 약하다고 강조했다. 따라서 보수적 정당체제하에서는 그들 사이에 기득권 유지를 위해 거래하기도 하고, 새로운 정당의 출현 가능성이 있을 때 이를 억압하기 위해 공모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미국 역시 유권자의 절반 이상이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상황임에도 공화당은 유색인종과 하층계급의 투표율 증대가 자신들에게 유리하지 않기 때문에, 민주당 의원들도 현직의 높은 재선율이라는 유혹과 투표율의 증대가 가져올 불확실성 때문에 투표자 등록제 폐지와 같은 투표율을 높일 수 있는 손쉬운 제도적 개선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다. 그 결과 전체 유권자를 기준으로 하면 투표율을 대통령 선거에서 50% 안팎에 머물게 된다.

 

우리나라라고 예외는 아니다. 대한민국 수립 이후 오랜 기간에 걸친 권위주의 정치체제와 그 동원체제에 아직도 익숙한 국민들이 많다. 그 경향이 투표패턴에도 나타난다. 그 패턴을 보면 저소득층, 고연령층, 여성, 저학력층, 농촌지역 등은 높은 투표율을 보이는 매우 기이한 투표 패턴을 보여준다. 이는 미국과는 정반대의 현상이다. 87체제 이후 20대 신규 유권자의 투표 불참 비율이 이론적으로 설명 불가능할 정도로 증대되었다. 이는 이렇게도 설명 가능하다. 소득 및 계급 위치와 투표율 간의 상관관계가 점차 과거와는 정반대의 패턴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의 조사결과를 보도록 하자. 주관적 계급 분류와 투표율, 그리고 소득과 투표율 간에는 매우 높은 상관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응답자 가운데 자신의 소속 계층을 상층으로 분류한 응답자의 투표율은 하층이라고 분류한 응답자보다 8.5% 높았다. ‘상층중상층응답자를 묶어 계산한 투표율 역시 하층중하층응답자보다 10% 높았다. 월소득 250만원 이상이라는 응답자의 투표율은 200만원 이하라는 응답자의 투표율보다 10%높게 나타난다. 이를 해석해보자면 투표 참여는 부자 동네일수록 높고 반대로 가난한 동네일수록 정치에 기대를 걸지 않으며 투표에 불참하는 비율이 높다는 것이다.

 

결론

냉전 반공주의가 헤게모니의 영향력을 갖는 정치적 대표 체제에서 서민의 이익은 대표되지 못한다. 서민층이 정치 수준에서 대표되지 못한 결과, 사회적 수준에서 서민층에 대한 상층계급의 오만과 차별은 강화되고 못사는 사람에 대한 공공연한 비하가 가능해진다. 이런 조건에서 계층구주의 상향 이동에 대한 열망과 상층계급의 문화적 아비투스를 갖고자 하는 거의 필사적이라 할 수 있다. 이른바 명품에 대한 맹목적 선호가 그 대표적 예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존경쟁의 가열화, 출세지향적인 행태가 일반화되어 버린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이유는 계층적으로 낮은 위치에 있으면 한 인간으로 대우받을 수 없다. 이는 외양을 중시하고 획일주의가 지배하는 사회를 만드는 힘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런 현상의 다른 한편은 개인의 도적적 자율성이 부재한 상황, 인간 내면의 황폐화로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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